"마리짜 강변의 추억 / La Maritza"
- 실비 바르탕 / Sylvie Vartan
La Maritza c'est ma riviere 마리짜는 나의 강이에요
Comme la Seine est la tienne 세느가 그대의 강이듯이
Mais il n'y a que mon pere 그러나 지금 내 기억 속에
Maintenant qui s'en souvienne 추억으로 남아 있는 건
Quelquefois... 나의 아버지뿐이에요...
De mes dix premieres annees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Il ne me reste plus rien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Pas la plus pauvre poupee 가엾은 인형과
Plus rien qu'un petit restrain 한 가닥 옛 노래 구절 외에는
D'autrefois... 아무것도...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Tous les oiseaux de ma riviere 내 강의 새들은 모두 우리에게
Nous chantaient la liberte 자유를 노래하고 있었어요
Moi je ne comprenais quere 나는 알지 못했지만
Mais mon pere lui savait 나의 아버지는 알고 있었어요
Ecouter... 그걸 듣고 계셨어요...
Quand l'horizon s'est fait trop noir 강가에 어둠이 내려 앉으면
Tous les oiseaux sont partis 새들은 모두 희망의 길로
Sur les chemins de l'espoir 떠나가고 있었어요
Et nous ont les a suivis 그 새들의 뛰를 쫓아 우리도 온 거예요
A Paris... 파리로...
- De mes dix premieres annees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Il ne reste plus rien... rien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Et pourtant les yeux fermes 그래도 눈 감으면 떠오르는 건
Moi j'entends mon pere chanter 옛 노래 부르시던 아버지의
Ce refrain... 목소리뿐이에요...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La la la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라 라 라...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 1944-)'은 1944년 불가리아의 이스크레츠(Iskretz, Sofia Province, Bulgaria)에서 태어났고 유년을 소피아(Sofia)에서 보냈습니다. 불가리아를 구소련 군대가 점령하였고 불가리아 나라 전체가 공산체제로 들어선 시기였습니다. 실비 바르탕의 아버지 '조르게스 바르탕니앙(Georges Vartanian)'은 소피아의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하였고 그의 친구이자 영화 감독인 '다코 다코프스키(Dako Dakovski, 1919-1962)'의 권유로 그녀의 나이 8세 때인 1952년에 다코 다코프스키가 감독을 맡았고 '필립 쿠테프(Filip Kutev, 1903-1982)'가 음악을 맡은 불가리아 영화 '멍에(Pod Igoto, 1952)'에서 여학생 역으로 출연하였습니다.
영화 '멍에(Pod Igoto, 1952)'는 불가리아 대문호인 '이반 바조프(Ivan Vazov, 1850-1921)'의 불가리아의 1876년 4월 반투르크 봉기를 그린 장편소설 '멍에(Pod Igoto, 1893)'를 토대로 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실비 바르탕은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연예계에 첫발을 디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말경에 그녀 가족의 주택이 당에 징발 당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나이 8세 때인 1952년 12월에 그녀의 가족 모두는 프랑스로 망명의 길에 올랐습니다.
프랑스에 정착한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의 성을 '바르탕니앙(Vartanian)'에서 '바르탕(Vartan)'으로 줄여서 고쳤고 모두 바르탕(Vartan)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61년에 실비 바르탕은 오빠 '에디 바르탕(Eddie Vartan, 1937-2001)'의 주선으로 데카 레코드(Decca Records)사와 손을 잡았고 프랑스 록 가수 '프랭키 조르당(Frankie Jordan, 1938-)'과 함께 듀엣으로 부른 '지칠대로 지친(La Panne D'essence / Out Of Gas)'의 곡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사랑과 함께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이 곡은 프랑스 TV에도 소개되었고 많은 인기를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실비 바르탕은 올랭피아(L'Olympia) 극장에서 '젊은 우상(Les Idoles Des Jeunes)'의 공연 무대에 출연하였고 미국 가수 '슈 톰슨(Sue Thompson, 1925-)'의 히트곡 '새드 무비 / 슬픈 영화(Sad Movies)'의 곡을 샹송으로 번안한 '슬픈 영화(Quand Le Film Est Triste / Sad Movies)'의 곡을 비롯하여 '매디슨 트위스트(Madison Twist', '운동(Le Locomotion)', '내 친구들(Tous Mes Copains)' 등의 곡을 불러 크게 히트하였으며 프랑스 음악계에 록 음악의 돌풍인 '예, 예 디바(Ye, Ye Diva)' 시대를 열어간 선두 주자 여성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랭피아 극장 '빈체 테일러(Vince Taylor, 1939-1991)'의 공연 무대에도 우정 출연하였고 이 자리에서 프랑스 록 음악 선두 주자 '조니 할리데이(Johnny Hallyday, 1943-)'와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었습니다. 그녀는 1963년 그녀의 생일인 8월 15일에 조니 할리데이와 약혼식을 가졌고 조니 할리데이와 함께 콘서트 투어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으며 크게 히트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실비 바르탕은 '슬픈 영화(Quand Le Film Est Triste / Sad Movie)'의 곡을 불러 많은 사랑을 받았고 프랑스 연예잡지 '살뤼 레 코펭(Salut Les Copains)'지의 인기 투표에서 여성 가수 부문 1위를 차지하였으며 프랑스 음악계의 예, 예 디바(Ye, Ye Diva)의 여왕으로 칭송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풍적인 인기도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실비 바르탕과 조니 할리데이 부부는 프랑스에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칭송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실비 바르탕은 1964년에 '미셀 부와롱(Michel Boisrond, 1921-2002)'이 감독을 맡았고 '게오르게 갈바렌츠(Georges Garvarentz, 1932-1993)'가 음악을 맡은 영화 '우상(優像)을 찾아라(Cherchez L'Idole, 1964)'에 출연하였고 O.S.T. 테마곡 '춤추러 가기 위해 가장 우아하게(La Plus Belle Pour Alle Dander)'의 곡을 직접 불러 많은 사랑과 함께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그댈 지켜보고 있어요(I'm Watching You)', '트위스트 노래를(Twiste Et Chante)', '내가 노래하는 경우(Si Je Chante)'등의 곡을 히트시켰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64년에는 '마셀 에차드(Marcel Achard, 1899-1974)'의 작품을 토대로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1927-1989)'가 감독을 맡았고 '자케스 메텐(Jacques Metehen, 1903-1986)'이 음악을 맡은 영화 '감자(Patate, 1964)'에 출연하였고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1968년에는 지금 흐르고 있는 '마리짜 강변의 추억(La Maritza)', '고독(Solitude)', '디스코 퀸(Disco Queen)' 등의 곡을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실비 바르탕은 1981년에 조니 할리데이와 이혼하였고 같은 해인 1981년에는 일본 도쿄 음악제 심사위원으로 위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도쿄 음악제에 같이 참여하였고 미국에서 음반 제작회사를 경영하는 '토니 스코티(Tony Scotti, 1939-)'와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었고 이들 둘은 1984년에 결혼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테이프 테이프(Tape Tape)', '댄스 인생(Danse Ta Vie)', '치명적이에요(C'est fatal)' 등의 곡을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이어서 '시바의 여왕(La Reine De Sava)', '사랑은 외로워요(Love Is Blue / L'Amour Est Bleu)', '음악은 흐르고(The Music Played)', '나와 함께(Avec Moi)', '무명 용사(Les Hommes)', '빗줄기의 리듬(En Ecoutant La Pluie)',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교향곡 제40번 G단조 1악장(Symphony No.40 In G Minor, K.550, Molto Allegro)을 재음미한 '친애하는 모차르트(Caro Mozart)' 등의 곡을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미국 저널 타임(Time)지와 유럽의 언론들은 공식적으로 실비 바르탕을 프랑스의 새로운 국민적 우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시바의 여왕(La Reine De Saba)'의 곡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전승에 의해 BC 10세기에 활동한 고대 시바 왕국의 여왕(Queen Of Sheba)을 그린 노래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시바의 여왕의 전설이 살아 숨쉬고 있는 지금의 예멘(Yemen) 공화국의 한 지역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걸프만(Gulf Of Aden)에 접해 있는 유서 깊은 나라입니다. 남북 예멘으로 분단 상태를 유지해오다 국경분쟁과 통일원칙에 대한 합의를 반복하는 악순환 끝에 1990년 5월 22일에 남북 예멘이 합의통일을 달성하였고 단일국가 예멘 공화국을 이루었습니다.
구소련의 붕괴로 1989년 11월 9일에 동서 냉전과 분단 국가의 공산주의 체제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고 1990년 10월 3일에는 독일인들의 숙원인 대망의 독일 통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제 동독 독일인들의 공산주의 체제 거부와 민주화 운동이 기폭제가 되었던 독일 통일이 된지도 이미 22년으로 접어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북한은 3대 세습 합리화 작업을 위해 극에 극을 치닫고 있어 꽁꽁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봄은 과연 언제 어떻게 어디서부터 올 것인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가리아 역시 구소련 붕괴와 공산체제 붕괴로 왕래가 가능해졌습니다. 실비 바르탕은 8살 때 조국을 떠난 후 38년이 지난 그녀의 나이 46살 때인 1990년 10월에 불가리아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인 소피아 국립극장 콘서트 무대에서 그녀는 '춤추러 가기 위해 가장 우아하게(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의 곡 등 그녀의 대표곡들을 불러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리짜 강변의 추억(La Maritza)'의 곡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불렀고 수많은 불가리아인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고 합니다. '내 조국 불가리아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너무나도 기다려 온 오늘이에요. 철없던 8살 때 내 아버지 손을 잡고 여러분들의 곁을 떠났기에 지금 이 순간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참고 있는지 여러분들은 상상이 안될 거예요. 이제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어린 시절을 되찾은 느낌이 드네요. 예나 다름없는 집들과 풍경들 그리고 어릴 적 내가 살던 이스크레츠에 흐르던 마리짜의 강물도 여전하겠지요. 마리짜는... 마리짜 강은 나의 강이에요...'라며 그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실비 바르탕은 1990년에 '당신이 있을 때(Quand Tu Es La)', 1998년에는 '다리나(Darina)', 1999년에는 '드레스(Les Robes)', 2004년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Ce N'est Pas Rien)', 2007년에는 '내가 갈 거예요(Et Je M'en Vais)', 2009년에는 '연애 편지(Une Lettre D'amour)', 2011년에는 '푸른 태양(Soleil Bleu)', 2013년에는 '좀더 가까이 와서(Come A Little Closer)' 등의 곡을 발표하였고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실비 바르탕은 1998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를 수여 받았으며 2005년에는 세계보건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해왔습니다. 실비 바르탕은 록 음악을 발 빠르게 소화해냈고 아이돌(L'Idole / 우상 / 優像) 스타로 떠올라서 프랑스 음악계에 가장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프랑스 샹송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입니다.
- 김기원의 음악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