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 Der Ring Des Nibelungen" 중
"발퀴레의 기행(騎行) / The Ride Of The Valkyries"
-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The Vienna Philharmonic Orchestr
- 지휘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 Wilhelm Furtwangler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는 1813년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독일 오페라의 혁신가로 널리 알려진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작곡가입니다. 그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Carl Friedrich Wagner)'는 경찰 공무원으로 근무하였으나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가 출생한 후 여섯달 만에 장티브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배우인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하였고 드레스덴(Dresden)으로 이주하게 된 바그너는 9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8세 때인 1831년에 라이프치히대학(University Of Leipzig)에 들어가 철학과 음악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으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과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의 영향을 받아 음악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18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첫 오페라 '혼례(Hochzeit)'를 비롯해서 1834년에 '요정(Die Feen)', 1836년에 '사랑의 금지(Das Liebesverbot)'를 작곡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두 번째 작품인 '요정(Die Feen)'은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그동안 상연되지는 않았고 그가 죽은 직후인 1883년에 뮌헨(Munchen)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마그네부르크(Magdeburg)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일하였으며 1836년에 여배우인 '크리스티네 빌헬르미네 미나 플래너(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 1809-1866)'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령인 리가(Riga)의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을 맡아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부인 미나 플래너가 다른 남자와 가출을 하였고 후에 다시 돌아와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불행한 결혼의 상처를 안은 채 1839년 '리엔치(Rienzi)'를 작곡하던 중 리가를 떠났고 파리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운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1842년 그의 작품 '리엔치(Rienzi)'가 독일 작센공화국 수도인 드레스덴의 드레스덴 왕립 오페라 극장(The Dresden Court Theatre)에서 초연된 것이 계기가 되어 드레스덴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드레스텐 왕립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841년에 자신의 시와 음악으로 만든 낭만적 오페라 '방황하는 네델란드인(Der Fliegende Hollander)'을 1943년에 이 드레스덴 왕립 오페라극장에서 직접 지휘하였고 초연되었습니다. 이어서 그의 작품 '탄호이저(Tannhauser)'는 1845년에 상연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알려진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 제9번 D단조, 합창(Beethon, The 9th Symphony In D Minor, Choral)'을 지휘하여 그 진가를 널리 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드레스덴 체재는 좌익 정치 가담행위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은 드레스덴으로 번졌고 1849년 드레스덴에서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드레스덴에 있는 혁명회의와 회합에 가담하였고 바이에른 국왕에게 호소하는 연설문을 기초한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프러시아의 군대가 진주하였고 혁명은 진압되었으며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헝가리 출생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집에 잠시 피신한 후 스위스의 취리히(Zurich, Switzerland)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위험인물로 분류되었고 궐석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던 것입니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고 스위스 취리히로 피신한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스위스 직물류의 거상인 '오토 폰 베젠동크(Otto Von Wesendonck)'의 후원으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오토 폰 베젠동크의 부인 '마틸데 베젠동크(Mathilde Wesendonck, 1828-1902)'와 금지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그녀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뇌를 담아 쓴 편지 다섯 편의 시에 각각 곡을 붙여 5곡으로 된 '베젠동크 가곡집(Wesendonck Lieder)'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베젠동크 가곡집(Wesendonck Lieder, 5 Songs For Voice & Piano Or Orchestra, WWV 91)'의 일부를 확장 발전시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담아 승화시킨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내놓았습니다.
그의 부인 미나 플래너에 의해 마틸데 베젠동크와의 관계가 발각되었고 1858년에 그는 스위스 취리히를 떠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59년에 다시 파리로 이동해 '탄호이저(Tannhauser)'의 새로운 개정판인 새 '탄호이저(Tannhauser)'의 상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1864년에 19세의 나이로 바이에른(Bayern)의 새로운 국왕으로 오르게 된 '루드비히 2세(Ludwig Ⅱ, 1845-1886)' 국왕에 의해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정치적인 추방령이 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루드비히 2세 국왕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야말로 독일정신의 상징이라고 숭배하면서 그를 궁정에 초빙하기도 하였습니다. 루드비히 2세 국왕은 부왕인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Ⅱ, 1811-1864)' 국왕이 1864년 3월 서거함에 따라 왕위를 계승받았으며 그는 예술적인 감성이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국왕에 오르기 전부터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Schloss)의 건축 등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1886년에 완공된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을 비롯하여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트리아농 궁전을 모방한 '린더호프 성(Schloss Linderhof)'과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헤렌심제 성(Herrenchiemsee)'을 완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루드비히 2세 국왕은 1886년 6월 8일에 궁정 의료진으로부터 정신병자로 판정을 받아 폐위되었습니다. 뮌헨 근교의 '베르크 성(Schloss Berg)'에 거처하던 중 폐위 5일 후인 1886년 6월 13일 '슈타른베르크(Starnberg)' 호숫가에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된 불운의 국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루드비히 2세 국왕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인 뮌헨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으며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1862년에 그의 아내 미나 플래너와 이혼한 상태였고 1865년에 스위스 루체른(Lucerne, Switzerland) 교외의 트리프센(Tribschen)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미나 플래너는 1866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868년에는 악보를 외워서 지휘하는 '암보(暗譜) 지휘'의 전통을 세우기도 한 '한스 폰 뷜로(Hans Von Bulow, 1830-1894)'의 지휘로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가 초연되었습니다. 이 오페라는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가장 밝은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습니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며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기도 한 '코지마 리스트(Cosima Liszt, 1837-1930)'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869년 6월 6일에 출생한 아들 '지그프리트 바그너(Siegfried Wagner, 1869-1930)'의 생일을 축하하여 '지그프리트 목가(Siegfried Idyll)'를 작곡하였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그프리 목가(Siegfried Idyll)'는 1870년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가 아내 코지마의 33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작곡한 교향시 '트리프센 목가(Tribschen Idyll)'였으나 후에 아들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이름을 붙여서 '지그프리트 목가(Siegfried Idyll)'로 곡명을 바꿨다고도 합니다.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후에 아버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의 지휘자 겸 작곡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악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1876년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Bayreuth)에 바이로이트 축제극장(Bayreuth Festpielhaus)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리고 극장 개관기념으로 그의 대규모의 거대한 악극인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 /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 The Ring Of The Nibelung)' 전곡을 상연하였습니다.
그는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 The Ring Of The Nibelung)'를 악극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 The Rhine Gold)', 악극 '발퀴레의 기행(Die Walkure / Walkurenritt / The Ride Of The Valkyries)', 악극 '지그프리트(Siegfried)', 악극 '신들의 황혼(Gotterdammerung / Twilight Of The Gods)' 등 4부작의 대규모 악극으로 구성하여 총14시간 30분이나 소요되게 하여 상연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그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 The Ring Of The Nibelung)'는 그 당시까지의 오페라와는 다르게 아리아나 합창등을 배제하였습니다. 웅변적이고 풍부한 감정표현을 발현키 위한 무한선율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악곡의 종지나 악절의 구분등도 피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끊김 없이 연속적으로 흐르도록 하였으며 장장 14시간 30분에 걸친 대규모 악극으로 구성하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그는 26년간에 걸쳐 심혈을 쏟아붓고 편성한 악극들을 음악과 연극, 철학과 문학, 예술 일반을 종합하여 '총체예술(Gesantkunstwerk / Total Work Of Art)'을 완성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예술의 극대화를 기하는데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1876년 자신이 건립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개관기념으로 초연하기에 이르렀고 전 유럽의 명사들이 개관기념 행사에 참관하여 많은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거대한 4부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 The Ring Of The Nibelung)'는 오페라 사상 길이 빛나는 최대 오페라로 평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세계적인 바이로이트 축제행사의 개최지로 유명한 공연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니벨룽겐(Nibelungen / The Nibelung)'은 수천년 전 북유럽 게르만 여러 부족들의 신화(Saga)에 나오는 난장이(Dwarfs)들을 말합니다. 이들 난장이들이 태초에 지옥을 지배하였다고 전합니다.
북구 신화에 의하면 태초, '오딘(Odin)'이 '에이시어(Aesir)'라고 하는 여러 신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지옥의 거인들인 '위미르(Ymir)'와 치열한 격전 끝에 어렵게 승리를 끌어냈습니다. 대승을 거둔 오딘은 위미르의 육신으로 지구를 만들게 됩니다. 위미르의 피로는 바다와 강과 호수를, 뼈로는 산과 바위를, 머리카락으로는 나무를, 두개골로는 하늘을, 뇌수로는 우박과 구름을, 눈썹으로는 '미드가르드(Midgard)'를 조성하여 인간의 거주지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딘은 하늘에 태양과 달을 설치하였고 진로를 정하여 밤과 낮은 물론 계절의 주기도 정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주신 '오딘 / 보탄(Odin / Votan)'을 위시해 주위 신들이 전용으로 거주하는 '아스가르드(Asgard)'를 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갈 수 있게 한 금과 은으로 된 궁전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하여 오딘은 이제 위미르의 모든 존재를 모두 말살시키게 됐다고 쾌재를 외치며 승리의 나팔을 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딘은 위미르를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오딘이야말로 위미르의 살에서 '난장이(Dwarfs)'들이 태어날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난장이들이 '니벨룽겐(Nibelungen / The Nibelung)'이라고 불리어졌고 계속하여 지옥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 '니벨룽겐(Nibelungen)'들의 왕 '안드바리(Andvari)'는 '황금과 반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 '반지(Der Ring / The Ring)'는 특별한 마법을 발휘하면서 재물은 물론 권력까지도 가져다주었고 일명 '니벨룽겐의 반지 /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 The Ring Of The Nibelung)'라고도 불려졌습니다. 따라서 이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만큼은 신주 모시듯 아주 소중하게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지키는 자가 있으면 이를 훔쳐 볼려고 하거나 이를 뺏으려는 자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실로 '황금과 반지'를 두고 뺏고 뺏기면서 야기되는 과정들을 보면서 이 신화를 통한 인간들의 삶의 지혜와 희노애락 의 기준등이 엇갈리게 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시사하는 바가 그때 그때 사회환경에 따라서 달라지게 됌도 알 수 있습니다.
'황금과 반지'는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순환할 수 밖에 없는 권력의 속성과 일맥상통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둥근 반지(Round Ring)'는 권력의 순환을 암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권력자라 해도 그 이면에는 반드시 약점이 있게 마련이고 새들의 지저귐과 같이 영원한 비밀 또한 있을 수 없으며 영원히 지켜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함이 존재할 수 조차 없다는 것도 이 신화는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화를 근거로 하여 독일어로 쓴 민중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 니벨룽의 노래(Das Nibelungen Lied / The Song Of The Nibelungs)'는 13세기 정치, 사회적으로 음모가 난무하던 그 시대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작자는 미상이며 다만 어느 오스트리아 궁정시인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Das Nibelungen)'에서 극 중 네덜란드의 왕자 지그프리트(Siegfried)와 아이슬란드의 여왕 브룬힐트(Brunhild)를 모두 비극적 최후로 맞이하게 종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세기 독일의 작곡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는 그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에서 장엄한 협주곡을 통하여 인간들의 처참한 파괴와 살육으로 얼룩진 혼탁한 사회를 반성하고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영국 판타지소설 작가 'J.R.R.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의 '반지 전쟁(The Lord Of The Rings)'에서는 냉전체제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선과 악의 대결로 이데올르기적 시대상을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 The Ring Of The Nibelung)' 중 악극 '발퀴레의 기행(Die Walkure / Walkurenritt / The Ride Of The Valkyries)'은 처참하기 이를 때 없는 인간들의 살육과 파괴로 얼룩진 혼탁한 사회의 정의구현과 반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발퀴레(Die Walkure / The Valkyries)는 날개달린 말을 타고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주신 '오딘 / 보탄(Odin / Votan)'의 궁전이 있는 발할라(Valhalla) 성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다가 죽은 용사들의 영혼과 부상 당한 병사들을 운반하는 임무를 띤 전쟁 처녀들입니다. 주신 '오딘 / 보탄'과 지혜의 여신 '에르다(Erda)' 사이에서 태어난 9명의 딸들입니다. 발퀴레들이 구원의 손길을 높이 치켜들어 용맹스럽고 활기차게 하늘을 달리는 모습들을 웅장하고 힘찬 협주곡이 끊임없이 울려퍼지면서 희망찬 미래를 염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77년에는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Parsifal)'을 작곡하기 시작하였고 4년 후인 1881년에 완성하였으며 1882년에 상연되었습니다. 그는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이 상연된 후 요양차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로 갔습니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1883년 2월 13일 요양차 머물고 있는 베네치아에서 그의 나이 69세를 일기로 우리들에게 불멸의 대작 '총체예술(Gesantkunstwerk / Total Work Of Art)'을 남겨놓고 영원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은 다시 바이로이트로 되돌아 왔으며 바이로이트의 반프리트의 정원(Wahnfried Garden)에서 영면하고 있습니다.
독일 오페라의 혁신가로 불려진 그는 혁명에 가담하고 체포령이 떨어져 오랜 도피 기간 동안에 만든 작품들을 통해서 기악과 성악 그리고 드라마와 무대장치가 종합적으로 결합한 '총체예술(Gesantkunstwerk)'을 실현시켰던 것입니다. 아울러 드라마는 모든 표현의 목적이고 음악은 모든 표현의 매체라고 주장하면서 영원 불멸의 거대한 악극인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를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나치(Nazi) 독재 체제가 태동되기 한참 전인 1883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한때 반유태주의 운동에 앞장선 사실로 비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후에 그의 잘못된 반유태인적인 사고와 가치관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비난을 받으면서 그는 극도의 찬반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독일 음악의 혁신가로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제왕으로 보편적인 감동을 안겨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같은 해인 1813년에 태어난 세계적인 작곡가이며 오페라의 양대 산맥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곁에 오페라의 세계적인 거장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신이 되어 영원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The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 Wiener Philharmoniker)'은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관현악단입니다. 유럽을 비롯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최고의 관현악단입니다.
1842년 3월 28일 빈 궁정가극장의 악장인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 1810-1849)'의 지휘로 관현악 연주회를 열게 되면서 창단하였습니다. 오페라 관현악단을 모체로 하여 태동된 오케스트라로 오토 니콜라이가 상임 지휘자를 맡아 관현악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독자적인 연주회 횟수는 적었지만 오스트리아 최초의 연주회 전문 관현악단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습니다.
1848년 상임 지휘자 오토 니콜라이의 사임으로 잠시 객원 지휘에 의존하게 되었고 1854년부터 1857년까지 '칼 에케르트(Karl Eckert, 1820-1879)'가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였습니다. 1875년부터 1882년까지 그리고 1883년부터 18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처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1843-1916)'가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였고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의 교향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초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98년에는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가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였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기념 음악제(The 1900 Paris World Exposition)'에 초빙되어 최초의 국외 공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03년에 상임 지휘자 제도를 폐지하고 잠시 객원 지휘자 제도를 도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08년에 '펠릭스 바인카르트너(Felix Weingartner, 1863-1942)'를 정기 지휘자(Abonnementdirigent)로 영입하면서 사실상의 상임 지휘자 제도를 부활시켰던 것입니다. 1927년에는 펠릭스 바인카르트너의 후임으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 1886-1954)'가 1930년까지 정기 지휘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30년부터 1933년까지는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 1893-1954)'가 마지막 정기 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1933년 클레멘스 크라우스 정기 지휘자를 끝으로 완전한 상임 지휘자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1933년 이후에는 매 시즌마다 단원들이 선출한 객원 지휘자가 지휘를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었고 독일의 나치(Nazi)는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대한 강제해산 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 1886-1954)'를 비롯한 음악계 중진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악단의 해산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클레멘스 크라우스의 지휘로 1939년 12월 31일에 역사적인 '특별음악회(Ausserordentiliches Konzert)'를 개최하였습니다. 실은 이 음악회가 제1회 '비엔나 신년음악회(The New Year's Concert Vienna / Das Newjahrskonzert Der Wiener Philharmoniker)'의 필두가 되었고 제2회 '비엔나 신년음악회'부터는 매년 1월 1일에 개최하였습니다. 제1회 음악회의 프로그램 구성은 '요한 스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Ⅱ, 1825-1899)'의 작품을 중심으로 연주되었습니다. 제2회 '비엔나 신년음악회'부터는 주로 '요한 스트라우스 1세(Johann StraussⅠ,1804-1849)', '요한 스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Ⅱ, 1825-1899)', '요셉 스트라우스(Josef Strauss, 1827-1870)', '에두아르드 스트라우스(Eduard Strauss, 1835-1916)'의 작품들이 연주되었으며 이 밖에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작품도 간혹 연주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년음악회의 본프로그램이 끝나면 항상 앙코르 곡으로 오스트리아의 제2 국가로 알려진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An Der Schonen Blauen Donau, Op.314)'과 요한 스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Radetzky March, Op.228)' 등의 곡이 청중들의 손뼉소리와 함께 연주되는 전통을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실로 '비엔나 신년음악회'는 매년 1월 1일 비엔나 악우회관(Wiener Musikverein)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음악회로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는 세계적인 음악회입니다.
독일 나치에 오스트리아가 합병된 후로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유태계 단원들의 강제 해직과 망명 등으로 연주가 어렵게 되자 아리아인 음악가들로 대치하였고 나치 당원(Nazi Party)이자 친위대원이었던 '빌헬름 예르거(Wilhelm Jerger, 1902-1978)'가 단장을 맡아 연주회를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1941년 1월 1일에는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물이기도 한 '비엔나 신년음악회'가 많은 호응을 받으며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종전 직후 수 개월 동안 '비나치화' 운동과 '악단 재건'의 준비 활동 등으로 연주회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요제프 크립스(Josef Krips, 1902-1974)'의 지휘로 전후 첫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의 지휘자들을 영입하였고 레퍼토리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메이저 음반사인 데카(Decca)와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인 도이체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 등의 음반사에서 적극적인 녹음 활동을 하였고 음반 출시와 TV 방송 중계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과 일본에서 정기 순회공연을 개최하는 등 전 세계 곳곳에서 해외 투어 공연을 개최하였습니다. 특히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 관현악단 사상 유례없는 연주 여행용 전용 여객기를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제공받았으며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 1886-1954)'는 독일 출신으로 전 세계에 그의 명성을 떨친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이자 지휘자입니다. 고고학자인 그의 아버지 '아돌프 푸르트벵글러(Adolf Furtwangler, 1853-1907)'를 따라 자주 오페라, 콘서트에 참석하는 등 어릴적부터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의 부모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남다른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그의 음악 교육에 많은 후원을 해줬다고 합니다. 그는 독일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유명한 '요셉 라인베르거(Josef Rheinberger, 1839-1901)'로부터 작곡의 기초를 배웠고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막스 폰 쉴링스(Max Von Schillings, 1868-1933)'의 제자가 된 후로는 지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그의 나이 18세 때에 그의 스승인 막스 폰 쉴링스의 추천으로 뮌헨(Munich)의 한 연주회에 대리 지휘를 맡게 되면서 지휘의 세계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세가 되던 해인 1906년에 현재의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The Munich Philharmonic Orchestra)의 전신인 카임 관현악단(The Kaim Orchestra)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의 '교향곡 9번(Ninth Symphony)'을 지휘하게 되면서 정식 지휘자로 데뷔하였습니다. 그의 첫 지휘가 많은 찬사와 함께 호응을 받으면서 전 유럽에 그의 명성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자동맹의 도시(Hanseatic City) 뤼베크 오페라 극장(The Theater Lubeck / Stage Of The Hansestadt Lubeck)의 지휘를 맡는 등 오스트리아, 독일 등 유럽 여러 무대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경험을 쌓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915년부터 5년 동안 만하임 오페라(Mannheim Opera)와 만하임 오케스트라(The Mannheim Orchestra)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였습니다. 1922년 1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The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의 상임 지휘자인 '아르투르 니키쉬(Artur Nikisch)'가 죽게 되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습니다. 같은 해인 1922년 2월 9일에 아르투르 니키쉬의 추모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빌헬름 푸르트 벵글러는 추모 연주회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 3번, '영웅'(Symphony No.3, 'Eroica')과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의 최후의 가곡으로 1896년에 작곡된 '4개의 엄숙한 노래(Vier Ernste Gesange, Op.121,Ⅰ~Ⅳ)'를 지휘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르투르 니키쉬의 유언에 따라 그가 맡고 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The Leipzig Gewandhaus Orchestra)의 상임 지휘자 자리도 물려받았습니다.
빌헬름 푸르트 벵글러는 1924년 5월에 덴마크 출신인 '치틀라 룬트(Zitla Lund)'와 결혼하였고 신혼여행을 겸해 이탈리아 무대의 데뷔 콘서트를 가졌습니다. 같은 해인 1924년에 영국 런던에서 가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는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그는 자주 런던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25년에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The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를 지휘하면서 미국 무대의 데뷔 콘서트를 가졌습니다. 당시 청중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고 단원들로부터도 찬사를 받게 되면서 이후 2년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초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1927년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The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와 빈 국립 오페라 극장(Wiener Staatsoper)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이후 잘츠부르크 축제(Salzburg Festival)와 바이로이트 축제(Bayreuth Festival)의 음악 감독까지 맡았습니다. 그는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들을 석권하면서 세계 지휘계의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맡았던 여러 오케스트라들의 상임 지휘자 자리를 내놓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자리만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독일 나치(Nazi Party)가 집권하게 되면서 독일 내에서 활동 중인 많은 유태계 독일인들이 추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들 중에서도 추방 혹은 도피로 인해 하나둘씩 빠져나가게 되면서 정상적인 연주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예술 옹호를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1935년에 베를린 국립가극장(Berlin State Opera)의 총감독을 인수한 것을 계기로 나치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1943년 치틀라 룬트와 이혼하였고 1944년에 '엘리자베트 아커만(Elisabeth Akerman)'과 재혼하였습니다.
그리고 1945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나치 치하의 프로이센의 추밀원(State Councillor For Prussia) 고문을 맡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범으로 몰려 연주 활동 정지를 당하였습니다. 1947년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그의 유태계 음악가들을 위한 구제운동 등의 활동으로 무혐의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무죄판결로 복권이 되었고 1952년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 상임 지휘자 직에 정식으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각지의 공연 지휘 요청에 응하면서 음악제에 참여하는 등 열정적인 음악활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1954년 11월 30일 68세를 일기로 독일 바덴바덴(Baden-Baden, Germany) 근교 에버슈타인부르크(Ebersteinburg) 요양소에서 폐렴의 악화에 의해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 김기원의 음악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