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빛 인생 / La Vie En Rose" - 에디트 피아프 / Edith Piaf
"장미빛 인생 / La Vie En Rose"
- 에디트 피아프 / Edith Piaf
Des yeux qui font baisser les miens 내 시선을 떨구게 하는 눈
Un rire qui se perd sur sa bouche 입가에서 사라져 버린 미소
Voila le portrait sans retouche 손질하지 않은 한 남자의 초상화가 저기 있네요
De l'hommeauquel j'appartiens 나는 그의 것이에요
Quand il me prend dans ses bras 그는 나를 품안에 껴안고
Il me parle tout bas 가만히 내게 속삭였어요
Je vois la vie en rose 장미빛 인생이 보인다고
Il me dit des mots d'amour 내게 매일 사랑의 말들을 해주었어요
Des mots de tous les jours 내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어요
Et ca m'fait quelque chose 그는 내 마음 속에 들어와
Il est entre dans mon coeur 그 까닭을 아는 행복의 일부가 되었지요
Une part de bonheur 나를 위해선 그가 있고 그를 위해선 내가 있다고
Dont je connais la cause 그는 내게 말했어요
C'est lui pour moi, moi pour lui dans la vie 목숨을 걸고 맹세해주었어요
Il me l'a jure pour la vie 난 알고 있어요
Et des que je l'apercois 뛰고 있는 내 심장의 고동 소리를
Alors je sens en moi mon coeur qui bat 내 가슴 속에서 느끼고 있어요
Des nuits d'amour a plus finir 끝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밤들은
Un grand bonheur qui prend sa place 커다란 행복이 차지하고 있지요
Des ennuis, des changrins s'effacent 근심과 슬픔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Heureux, heureux a en mourir 죽어도 좋을 행복, 행복에 겨웠어요
Quand il me prend dans ses bras 그는 나를 품안에 껴안고
Il me parle tout bas 가만히 내게 속삭였어요
Je vois la vie en rose 장미빛 인생이 보인다고
Il me dit des mots d'amour 내게 매일 사랑의 말들을 해주었어요
Des mots de tous les jours 내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어요
Et ca m'fait quelque chose 그는 내 마음 속에 들어와
Il est entre dans mon coeur 그 까닭을 아는 행복의 일부가 되었지요
Une part de bonheur 나를 위해선 그가 있고 그를 위해선 내가 있다고
Dont je connais la cause 그는 내게 말했어요
C'est lui pour moi, moi pour lui dans la vie 목숨을 걸고 맹세해주었어요
Il me l'a jure pour la vie 나는 알고 있어요
Et des que je l'apercois 뛰고 있는 내 심장의 고동 소리를
Alors je sens en moi mon coeur qui bat 내 가슴 속에서 느끼고 있어요
La la la la la 라 라 라 라 라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는 모든 에너지를 그녀의 목소리에 일시에 쏟아붙는 '프랑스의 목소리'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작은 참새(The Little Sparrow)'이며 프랑스의 전설적인 국보급 샹송 가수입니다.
그녀의 본명이 '에디트 조반나 가시용(Edith Giovanna Gassion)'인 에디트 피아프는 1915년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서커스단 곡예사였고 어머니는 도시 변두리의 가수였으며 자선병원으로 가던 중 그녀를 낳았다고 전합니다.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서커스 곡예를 하던 아버지가 군에 입대하였고 혼자서 딸을 양육하기가 힘들었던 어머니는 그녀를 외할머니에게 떠맡기고 멀리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후 군에서 제대하여 돌아온 아버지는 그녀를 다시 자신의 어머니인 친할머니에게 맡겼습니다.
이후 1929년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길거리 노래 연주의 보조 역할을 해왔으며 생계를 위해 15세가 되는 해부터 혼자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상제리제 나이트 크럽(Le Gerny)의 사장인 '루이스 르프레(Louis Leplee)'에 의해 상제리제 나이트 크럽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행운을 잡게 되었고 여기에서 파리의 은어로 '작은 참새(The Little Sparrow)'인 '피아프(La Mome Piaf)'라는 애칭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녀를 그리 오래도록 붙잡아두지 않았고 그녀를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루이스 르프레가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하고 맙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에 관련한 혐의까지 받게 된 에디트 피아프는 실의에 빠져 난감해 하고 맙니다.
그 후 작곡가 '레이몽 아소(Raymond Asso, 1901-1968)', '말그리트 모노(Marguerite Monnot, 1903-1961)' 등의 격려에 힘입어 다시 재기한 그녀는 '나의 병사님(Mon Legionnaire)', '군단의 플래그(Le Fanion De La Legion)' 등의 곡을 발표하였고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에 샹송계의 스타덤에 올라설 때까지 그녀의 불운한 유년의 삶은 실로 비참하기 그지 없었던 파란만장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작은 체구여서 작은 참새로 불리기도 했던 에디트 피아프는 오직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혼을 토해내듯 노래를 불렀고 진실하고 열성적인 노래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에디트 피아프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한없는 경배는 미국을 비롯한 해외의 무차별적인 대중문화의 공격에 밀리지 않으려는 프랑스인들의 민족주의적인 자존심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1947년에 프랑스의 정상급 배우이자 가수인 '이브 몽탕(Yves Montand, 1921-1991)'과의 핑크빛 사랑의 사연이 담겨있는 대표적인 샹송으로 손꼽히는 지금 흐르고 있는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의 곡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사랑과 함께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연인이였던 세계 복싱 챔피언인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 1916-1949)'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그도 역시 에디트 피아프를 너무도 사랑했습니다. 마르셀 세르당은 1949년 뉴욕에서 개최되는 복싱경기 시합을 위해 뉴욕에 머물었고 베르사이유에서 공연 중인 에디트 피아프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 예정보다 일찍 뉴욕을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탄 비행기가 아조레스 해협 상공에서 추락하는 바람에 그는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마르셀 세르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이 컸던 그녀는 그녀의 방에서 두문불출하다가 1949년 어느날 삭발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마르셀 세르당과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그린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의 곡을 부르면서 그녀의 아픈 마음을 달랬습니다. 이 곡 역시 대표적인 샹송의 걸작으로 자리메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애절한 사랑이 담긴 곡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의 곡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1983년에 '클로드 르로슈(Claude Lelouch, 1937-)'가 감독을 맡았고 '프란시스 레이(Francis Lai, 1932-)'가 음악을 맡은 영화 '에디트와 마르셀(Edith Et Marcel, 1983)'에 담아 상영되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 샹송의 대부 '사를르 아즈나부르(Chareles Aznavour, 1924-)'의 회고에 따르면 '2005년에 출간된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라는 책은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초콜릿보다 더 많이 팔릴 만큼 주문이 쇄도했다'고 말했습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1951년에 '빠담 빠담(Padam Padam)', '내가 사랑하는 사람(L'Homme Que J'aimerai)', '아침부터 밤(Du Matin Jusqu'au Soir)', 1953년에는 '자니 넌 천사가 아니야(Johnny Tu N'es Pas Un Ange)', '청바지와 마틴(Jean Et Martine)', '십자가(Les Croix)', 1954년에는 '가엾은 장의 노래(La Goualante Du Pauvre Jean)', '반환(Retour)', '파리의 하늘 아래(Sous Le Ciel De Paris)', 1955년에는 '아코디언 연주자(L'accordeoniste)', '자비(Misericorde)', '전설(Legende)', 1957년에는 '군중(La Foule)', '여론(Opinion Publique), 1958년에는 '집시와 딸(Le Gitan Et La Fille)', '나의 회전목마(Mon Manege A Moi)' 등의 곡을 불렀으며 많은 사랑과 함께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교통사고로 쓰러졌을 때 그녀 곁에서 그녀를 보살펴주면서 사랑을 나눈 '조르쥬 무스타키(Georges Moustaki, 1934-)'의 곡 '주인님(Milord)'의 곡을 1959년에 불렀고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이어서 1960년에는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의 곡을 그녀 특유의 뼛속까지 사무치는 전율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로 불렀고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뜨거운 사랑을 듬뿍 받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의 곡은 그녀가 떠난지 30년이 지난 1994년에 '도리스 도리(Doris Dorrie, 1955-)'가 감독을 맡았고 '니키 라이저(Niki Reiser, 1958-)'가 음악을 맡은 독일의 영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Keiner Liebt Mich, 1994)'의 O.S.T. 테마곡으로 삽입되었고 극 중 주인공 '파니 핑크 / Fanny Fink(마리아 슈라더 분 / Maria Schrader, 1965-)'를 통해 재조명되었으며 다시 한 번 많은 사랑과 함께 히트한 명곡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1961년 겨울 그리스 출신 미용사 '테오 사라포(Theo Sarapo, 1936-1970)'와 사랑에 빠졌고 '사랑이란 그런 거지(A Quoi Ca Sert L'Amour)'의 곡을 듀엣으로 불렀으며 이들은 1962년에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1962년에는 '사랑을 할 권리(Le Droit D'Aimer)', '왈츠(Une Valse)', '약속(Le Rendez-Vous)', '카르멘의 이야기(Carmen's Story)', 1963년에는 '사랑 노래(Le Chant D'Amour)', '추적(Traque)', '베를린 사람(L'Homme De Berlin)' 등의 곡을 불럿고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그녀의 노래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오래도록 지구촌 만인의 가슴을 감동으로 울려주고 있는 것은 그녀의 노래가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그녀의 실제의 삶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1963년 한창의 나이인 48세에 프랑스인들의 비통한 슬픔을 뒤로 한 채 불멸의 명곡을 남기고 우리 곁은 떠났습니다. 그녀는 샹송을 세계의 주류 대중음악으로 인식 시켜주면서 사랑의 낙원을 향해 떠나간 것입니다.
- 김기원의 음악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