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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 Aida" 중에서 "개선 행진곡 / Triumphal March"

kwkimkw 2025. 2. 4. 10:15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 Aida" 중에서

"개선 행진곡 / Triumphal March"

 

 

   오페라 '아이다(Aida)'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작품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아이다(Aida)'는 이집트 고대 사원의 제단 밑에서 발굴된 남여의 해골에 근거해서 나온 이야기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이집트 고고학자 '오거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 1821-1881)'의 시나리오에 기초하여 프랑스의 유명한 대본 작가인 '카미유 뒤 로클(Camille Du Locle, 1832-1903)'이 쓴 프랑스어 대본을 이탈리아의 오페라 대본 작가로 유명한 '안토니오 기슬란초니(Antonio Ghislanzoni, 1824-1893)'가 다시 대본을 이탈리아어로 각색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이집트의 무장 '라다메스(Radames)'와 포로인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Aida)'와의 비극적이고 슬픈 사랑을 그린 불멸의 작품입니다.

 

   오페라 '아이다(Aida)'는 1869년 11월 수에즈 운하(Suez Canal)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 이집트 국왕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 1830-1895)'가 카이로에 건립한 왕립 오페라 극장(Khedivial Opera House / Royal Opera House) 개장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기 위해서 주세페 베르디에게 특별히 작곡을 의뢰하여 만들어진 불멸의 오페라 '제4막 제7장'으로 구성된 명작 오페라입니다. 1871년 카이로 왕립 오페라 극장(Khedivial Opera House) 에서 초연되었고 1872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La Scala) 극장에서 재연된 작품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오페라입니다. 그 후 오페라 '아이다(Aida)'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아레나 원형극장(Arena di Verona)의 상징적인 야외 오페라 공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으며 전세계 만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 웅장함은 만인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고 거대한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그리고 하늘에 솟구치며 닿을 듯한 오벨리스크 등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공연되었습니다. 역동적인 무대 세트와 조명 그리고 실제 동물들의 등장 등 '오페라 온 사이트(Opera-On-Site)'의 압권이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야외 오페라 '아이다(AIDA) !', '위대한 아이다(The Great AIDA) !'... 이렇듯 지구촌 곳곳의 만인들에게 가슴 속 깊이 가장 큰 감동을 안겨준 오페라였던 것입니다.

 

   장중하고 화려한 음악과 그 호화롭고 장대한 무대장치 등은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손 꼽힐 정도로 유명한 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오페라 '아이다(Aida)'는 웅대하고 장엄한 오페라, 오페라 중 오페라로 그 명성이 작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렇듯 웅대하고 장엄한 고전 명작 오페라 '아이다(Aida)'는 2000년에 미국 '월트 디즈니사(The Walt Disney Company)'에 의해 뮤지컬로 탄생한 현대판 뮤지컬 '아이다(Aida)'가 제작되었습니다. 뮤지컬 음악의 전설적인 작사가인 '팀 라이스(Tim Rice, 1944-)'는 그 당시 이집트 국경에 '누비아(Nubia)' 왕국이 존재했지만 이집트와 수단에 의해 분활되고 패망한 역사적 고증을 살려 '아이다(Aida)'의 조국을 에티오피아가 아닌 '누비아(Nubia)' 왕국으로 수정하는 등 원작의 일부를 현실에 맞게 고쳐 작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곡을 맡은 팝의 거장 '엘튼 존(Elton John, 1947-)' 역시 고전 음악에 현대식 팝과 록을 아우르면서 새롭게 작곡을 하였습니다. 전형적인 브로드웨이(Broadway) 뮤지컬과 차별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월트 디즈니사는 7년간의 긴 제작기간과 브로드웨이 최고 레벨의 제작비 1500만 달러를 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다 연극적이고 모던하면서 진지하고 영속적인 사랑이야기로 완성시킨 현대판 뮤지컬 '아이다(Aida)'를 뉴욕 브로드웨이(Broadway) 무대에 올려놓았으며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초연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뮤지컬 '아이다(Aida)'는 '토니 어워드(Tony Award)'에서 작곡상과 여우 주연상을 포함하여 무려 4개 부문의 상을 휩쓸기도 하였습니다. '그레미 어워드(Grammy Award)' 베스트 뮤지컬 앨범상을 수상하는 등 뮤지컬계 최고의 영예를 거머쥐었던 것입니다.

 

   오페라 '아이다(Aida)'의 '개선 행진곡(Triumphal March)'은 제2막 제2장에 나오는 이집트군의 영웅적인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 트럼펫 행진곡입니다. 화려한 개선행렬들과 함께 한데 어우러진 개선 행진곡의 힘찬 트럼팻 선율이 우리들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면서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이탈리아 파르마의 부세토 근교 론콜레(Roncole)에서 태어났으며 이탈리아가 최고로 자랑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제왕입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 음악교육은 받지 못하였고 8세 때에 오르간 교사로부터 오르간을 배우면서 음악적인 천재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20세 때에는 필하모닉 협회의 지휘자 겸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그의 음악을 좋아했고 후에 그의 장인이 된 부세토의 사업가인 '안토니오 바레치(Antonio Barezzi, 1787-1867)'의 후원에 힘입어 음악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안토니오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 바레치(Margherita Barezzi, 1814-1840)'의 가정교사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1836년에 마르게리타 바레치와 결혼하였습니다.

 

   1839년 그의 첫 번째 작품인 오페라 '오베르토(Oberto)'를 밀라노에서 상연하였고 성공을 거두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1840년에 갑작스런 그의 부인 마르게리타 바레치 베르디와 아이의 사망이라는 불행한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쓰여진 두 번째 작품인 오페라 '왕궁의 하루(Un Giorno Di Regno / King For A Day)'는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1842년에 쓰여진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Nabucco)'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울러 이 작품이 지닌 심각하고 극적인 양식들은 이후 베르디 작품의 작곡방식에 모델 케이스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 흐르고 있는 이탈리아 독립과 통일운동을 고양하는 애국적인 소재들 또한 그후에도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10여 개가 넘는 주세페 베르디의 작품들에서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벨칸토에 국민 애국정신을 더해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문학적 소재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문학을 사랑했던 주세페 베르디는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4대 비극의 하나인 '맥베스(Macbeth, 1605)'를 토대로 1847년에 오페라 '맥베스(Macbeth)'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판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으로 불리는 독일의 문호이며 고전주의 극작가이자 시인, 철학자, 역사가, 문학 이론가인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린 운문극 '간계와 사랑(Kabale Und Liebe, 1784)'을 토대로 1849년에 오페라 '루이자 밀러(Luisa Miller)'를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오페라 '루이자 밀러(Luisa Miller)'는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이끌어내기도 하였습니다.

 

   1940년대 유럽은 왕정에 맞서는 진보적 사상이 물결치던 시기였고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독립과 통일을 갈망하던 시기였습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남달리 애국심이 강했습니다. 그는 그의 오페라를 통해서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고취시켰고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을 위해 울었던 것입니다. 애국심이 담긴 그의 오페라가 공연될 때마다 온 국민들의 심금을 그토록 고동치게 했고 온 국민들은 주세페 베르디에 대해 끊임없는 애정으로 열광하였던 것입니다.

 

   1850년대 주세페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그의 작품들인 1851년의 성격극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와 1853년 1월의 성악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 그리고 같은 해인 1853년 3월의 성격극과 성악 오페라의 합성인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 椿姬)' 등 3개의 오페라를 통하여 아름다운 노래 중심의 벨칸토를 극복하면서 궁극의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855년의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Les Vepres Siciliennes)', 1857년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Simon Boccanegra)', 역시 1857년의 오페라 '아롤도(Aroldo)' 등의 오페라도 작곡 상연되었고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 '가면 무도회(Un Ballo In Maschera)'는 1858년에 나폴리를 위해서 쓰여졌지만 검열을 피해 다음해인 1859년에 로마에서 상연되었고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주세페 베르디는 1859년 8월에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한 '주세피나 스틀레포니(Giuseppina Strepponi, 1815-1897)'를 그의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왕실 가극장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오페라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을 작곡하였습니다. 1862년에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볼쇼이 카메니극장(Bolshoi Kamenny Theatre)에서 많은 찬사와 함께 초연되었습니다. 오페라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은 스페인의 시인, 극작가, 정치가인 '앙헬 데 사베드라((Angel De Saavedra, 3rd Duke Of Rivas, 1791-1865)'의 희곡 '돈 알바로, 운명의 힘(Don Alvaro, O La Fuerza Del Sino, 1835)'을 근거로 하여 만든 이탈리아의 오페라 대본작가로 유명한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Francescco Maria Piave, 1810-1876)'의 4막 8장으로 된 대본에 의해 작곡되었습니다. 1850년경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스페인의 귀족 '칼라트라바(Marquis Calatrava)' 후작의 죽음에 이어 극중 젊은 주인공으로 잉카제국 왕가출신 '돈 알바로(Don Alvaro)'의 연인이자 칼라트라바 후작의 딸인 '돈나 레오노라(Donna Leonora)'의 죽음, 칼라트라바 후작의 아들이자 돈나 레오노라의 오빠인 '돈 카를로(Don Carlo Di Vargas)'의 죽음 등이 어떤 운명의 힘에 의해 처절하게 죽어갑니다. 마지막 남은 주인공 '돈 알바로(Don Alvaro)' 역시 '구아르디아노(Padre Guardiano)' 수도원장과 수사들을 비웃으며 절벽 아래 낭떠러지로 투신자살하면서 극중 주인공 모두가 죽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 오페라입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습니다. 극중 '서곡(Overture)'은 오페라에 등장하는 주제들의 내용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고 오페라와 연관이 없이 독립된 관현악곡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단독의 완벽한 관현악곡으로 연주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주세페 베르디는 오페라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의 후반부를 고쳤습니다. '안토니오 기슬란초니(Antonio Ghislanzoni, 1824-1893)'에 의해 고쳐진 대본에 편곡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검열과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당국의 정치적 검열에서 허용되지 않는 살인행위와 투신자살 부분 등을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내용으로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규모 서곡을 붙여서 1869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카라 극장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다시 재연하였습니다. 이 수정판 오페라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 / The Force Of Destiny)'이 현재 일반적인 공연 판본으로 상연되고 있습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 1605)'를 토대로 1865년에 오페라 '맥베스(Macbeth) 제2탄'과 프리드리히 쉴러의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Don Carlos, Infant Von Spanien, 1787)'를 토대로 1867년에 오페라 '돈 카를로(Don Carlo)'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주세페 베르디의 작품 속에서 실험적으로 준비되었던 모든 소재들이 1870년에 이집트 수에즈운하의 개통을 축하하기 위하여 1871년에 쓰여진 오페라 '아이다(Aida)'에 하나의 결정체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는 창의력, 구성, 음악적 긴장, 형식 등을 잘 조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아름다운 노래 중심의 벨칸토를 극복하였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크게 확대시켰으며 극적인 진실이 한층 힘을 얻게 되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이탈리아 작곡가들로 19세기 전반에 벨칸토 오페라를 주도했던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 1792-1868)', '빈센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 1797-1848)' 등의 음악 스타일을 따르면서 단순하면서도 힘 있고 긴장감도 흐르는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실로 그는 자신의 오페라 작품들의 대본 제작에까지 깊이 관여하는 등 운율 하나하나에 이르는 세심한 부분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오페라의 요소인 청각적, 무대적 효과들을 그의 오페라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챙기면서 한 순간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큰 특징은 인간 내적인 감정들에 대한 표현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세밀하게 구성되는 멜로디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의 오페라는 복합선율적인 앙상불로 긴장감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선율을 상호 대치시켜 동시에 울리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힘 찬 박력이 솟구치면서 생기가 넘처흐르게 연주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주세페 베르디의 작품은 조아키노 로시니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확립하였고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에게 이를 계승 시켰던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작품은 역시 오페라 '아이다(Aid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페라 '아이다(Aida)'는 1869년 11월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 이집트왕이 카이로에 건립한 오페라극장 개장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기 위해서 주세페 베르디에게 특별히 작곡을 의뢰하여 만들어진 불멸의 오페라 '제4막 제7장'으로 구성된 명작입니다. 1871년 카이로에서 초연되었고 1872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La Scala) 극장'에서 재연된 작품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오페라입니다. 그 후 오페라 '아이다(Aida)'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아레나 원형극장(Arena di Verona)의 상징적인 야외 오페라 공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으며 전세계 만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 웅장함은 만인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고 거대한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그리고 하늘에 솟구치며 닿을 듯한 오벨리스크 등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공연되었습니다. 역동적인 무대 세트와 조명 그리고 실제 동물들의 등장 등 '오페라 온 사이트(Opera-On-Site)'의 압권이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야외 오페라 '아이다(AIDA) !', '위대한 아이다(The Great AIDA) !'... 이렇듯 지구촌 곳곳의 만인들에게 가슴 속 깊이 가장 큰 감동을 안겨준 오페라였던 것입니다.

 

   '아이다(Aida)'는 이집트의 고대 사원의 제단 밑에서 발굴된 남여의 해골에 근거한 이야기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대본 작가인 '카미유 뒤 로클(Camille Du Locle, 1832-1903)'이 쓴 프랑스어 대본을 안토니오 기슬란초니가 이탈리아어로 다시 각색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이집트의 무장 '라다메스(Radames)'와 포로인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Aida)'와의 비극적이고 슬픈 사랑을 그린 불멸의 작품입니다. 장중하고 화려한 음악과 그 호화롭고 장대한 무대장치 등은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손 꼽힐 정도로 유명한 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는 웅대하고 장엄한 오페라, 오페라 중 오페라로 그 명성이 작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렇듯 웅대하고 장엄한 고전 명작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는 2000년에 미국 '월트 디즈니사(The Walt Disney Company)'에 의해 뮤지컬로 탄생한 현대판 뮤지컬 '아이다(Aida)'가 제작되었습니다. 뮤지컬 음악의 전설적인 작사가인 '팀 라이스(Tim Rice, 1944-)'는 그 당시 이집트 국경에 '누비아(Nubia)' 왕국이 존재했지만 이집트와 수단에 의해 분활되고 패망한 역사적 고증을 살려 '아이다(Aida)'의 조국을 에티오피아가 아닌 '누비아(Nubia)' 왕국으로 수정하는 등 원작의 일부를 현실에 맞게 고쳐 작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곡을 맡은 팝의 거장 '엘튼 존(Elton John, 1947-)' 역시 고전 음악에 현대식 팝과 록을 아우르면서 새롭게 작곡을 하였습니다. 전형적인 브로드웨이(Broadway) 뮤지컬과 차별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월트 디즈니사는 7년간의 긴 제작기간과 브로드웨이 최고 레벨의 제작비 1500만 달러를 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다 연극적이고 모던하면서 진지하고 영속적인 사랑이야기로 완성시킨 현대판 뮤지컬 '아이다(Aida)'를 뉴욕 브로드웨이(Broadway) 무대에 올려놓았으며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초연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뮤지컬 '아이다(Aida)'는 '토니 어워드(Tony Award)'에서 작곡상과 여우 주연상을 포함하여 무려 4개 부문의 상을 휩쓸기도 하였습니다. '그레미 어워드(Grammy Award)' 베스트 뮤지컬 앨범상을 수상하는 등 뮤지컬계 최고의 영예를 거머쥐었던 것입니다.

 

   지금 웅장하고 화려하게 흐르고 있는 '개선 행진곡(Triumphal March)'은 제2막 제2장에 나오는 이집트군의 영웅적인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 트럼펫 행진곡입니다. 화려한 개선행렬들과 함께 한데 어우러진 개선 행진곡의 힘찬 선율이 우리들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고 있습니다. 아, 주세페 베르디의 '개선 행진곡(Triumphal March)'의 웅장하고 화려한 선율...트럼펫 선율이... 다시 한 번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오페라 이외의 작품으로 1873년에 '현악 4중주 e단조(String Quartet In E Minor)'와 1873년부터 1874년에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알레산드로 만초니(Alessandro Manzoni, 1785-1873)'를 위한 추모곡인 진혼 미사곡 '레퀴엠(Requiem)'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진혼 미사곡 '레퀴엠(Requiem)'의 초연을 끝으로 그의 음악활동을 중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1887년에 들어서서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뛰어난 대본 작가인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 1842-1918)'의 권유로 오페라 '오텔로(Otello)'를 작곡하였고 한동안 긴 공백기를 거친 다음 그의 나이 80세 때인 1893년에 서정 코믹 오페라인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오페라 '팔스타프(Falstaff)'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1894년에 자신의 재산을 들여 밀라노에 은퇴한 음악가들이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음악가 휴식의 집(Casa Di Riposo Per Musicisti)'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베네치아의 고딕 양식을 모방한 3층 건물로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약 55명의 은퇴한 음악가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주세페 베르디도 그의 두 번째 아내 주세피나 스틀레포니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하고 있습니다. 주세피나 스틀레포니는 189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세페 베르디는 그의 두 번째 아내 주세피나 스틀레포니와 사별했던 1897년을 전후하여 그의 작품의 합창과 오케스트라에 신을 찬양하는 노래인 '테 데움(Te Deum)'과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가 쓰여지기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제왕이며 세계적인 거장인 주세페 베르디는 1901년에 그의 나이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수많은 인파와 함께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휘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탈리아의 지휘자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의 지휘로 거행되었습니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 중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 자유의 송가(Chorus Of The Hebrew Slaves / Song For Liberty)'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장례식 후 '밀라노의 성지Cimitero Monumentale Di Milan)'에 안치되었고 1개월 후에 그가 세웠으며 그의 두 번째 아내 주세피나 스틀레포니가 잠들어 있는 '음악가 휴식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제왕으로 보편적인 감동을 안겨준 주세페 베르디와 독일 음악의 혁신가로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는 같은 해인 1813년에 태어난 세계적인 작곡가이며 오페라의 양대 산맥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곁에 오페라의 세계적인 거장 주세페 베르디는 신이 되어 영원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 이집트의 고대 수도 멤피스 왕궁의 넓은 홀은 고요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이집트의 나일 계곡과 테베를 에티오피아군이 곧 침공해 올 것이라는 첩보를 접하게 된다. 이집트 왕궁의 최고 제사장 '람피스(Ramfis)'는 젊은 '라다메스(Radames)' 장군을 향해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전하고 있었다. 그는 근엄한 어조로 침략자 에티오피아군에 대적할 용사로 라다메스 장군이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라다메스는 전쟁 포로로 잡혀와 왕궁의 노예로 있는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Aida)'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다의 사랑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에티오피아군에 대적하는 장군으로 선정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는 내심 쾌재를 외쳤지만 마음은 들떠 있었다. 라다메스는 '승전의 월계관을 아이다에게 바친다!'라는 아리아 '청아한 아이다(Celeste Aida)'를 행복한 마음으로 부르게 된다. 곧 이어서 라다메스를 짝사랑하고 있는 이집트 '파라오(Pharaoh)' 국왕의 딸 '암네리스(Amneris)' 공주가 나타난다. 암네리스 공주는 왕궁 내에 라다메스 장군을 흠모하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이 있는지 염탐 중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그녀의 일행 중 슬픈 얼굴로 등장하고 있는 자신의 노예 아이다가 바로 자신의 연적임을 알게 된다. 그때 파라오 국왕이 궁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파라오 국왕은 라다메스 장군을 에티오피아 토벌군 대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암네리스 공주는 라다메스에게 토벌대 깃발을 건네주면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라!'라는 합창과 함께 격려를 해주고 있었다. 왕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모두 궁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홀로 남게 된 아이다는 자기 조국 에티오피아의 승리가 아닌 사랑하는 라다메스의 승리를 염원하는 유명한 아리아 '이기고 돌아오라!(Ritorma Vincitor)'를 그녀의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열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다는 조국과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되면 사랑하는 라다메스를 저주하게 되는 모순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이다는 착잡하고 심란한 마음을 추스리지 못한 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치는 이 마음 이대로 얼어 터져라! 나의 신이시여, 궁휼히 여기소서! (Numi Pieta!)'를 부르며 기구한 운명의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멤피스의 발칸(Vulcan) 신전에서는 신성한 의식에 이어 무녀들의 '높으신 나의 신!'이라는 기도 소리가 울려펴지고 있었다. 라다메스 장군은 람피스로 부터 신성한 갑옷을 건내 받았다. 그는 갑옷을 들고 발칸 신전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 테베의 궁전안에 있는 암네리스 공주의 방에서 공주로 부터 라다메스가 전사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아이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흐느끼고 만다. 사실 오늘은 이집트 군대가 승리하여 개선하는 날이었다. 개선장군 라다메스와 그의 군대를 환영하기 위하여 파라오 국왕을 비롯한 모든 신하와 군중들이 테베까지 나가 영접을 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암네리스 공주는 아이다의 심중을 헤아려 보기 위해 그녀에게 전사했다고 거짓으로 말을 건넨 것이다. 암네리스 공주는 예상했던 것처럼 슬픈 표정으로 눈시울까지 뜨거워지고 있는 아이다를 보고 질투의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공주는 질투의 화살을 날리게 된다. 아이다에게 그를 즉시 단념하라고 명령까지 내리고 만다. 밖에서는 개선을 축하하는 군중들의 환호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암네리스 공주는 누가 더 라다메스를 사랑하는지 가늠해 볼 생각으로 아이다를 환영장소인 테베 거리로 데리고 가게 된다.

   테베 거리의 개선 행사장에는 수 많은 환영의 인파로 물샐 틈 없이 사람들로 물결치고 있었다. 너무도 힘찬 '개선 행진곡 (Triumphal March)'이 트럼펫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울려 퍼져나가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적군을 물리치고 개선한 라다메스 장군을 앞 세운 이집트 군대가 환영인파의 한 가운데를 가르고 파라오 국왕 앞에 서서 개선 신고를 했다. 암네리스 공주가 라다메스 장군의 머리에 월계관을 씌워주면서 환영행사가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이집트 개선군과 함께 끌려온 에티오피아 포로 중에는 아이다의 아버지인 '아모나스로(Amonasro)' 왕도 병사의 옷차림으로 위장을 한 채 끼어 있었다. 아모나스로는 이집트 파라오 국왕에게 거짓으로 에티오피아 왕이 전사했다고 말하면서 포로들의 생명만큼은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때마침 파라오 국왕은 개선한 라다메스 장군에게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면 들어 주겠다는 명을 내린다. 그는 서슴없이 소원을 말했다. 자기가 이끌고 온 포로들의 생명을 살려 달라고 말했다. 결국 파라오 국왕은 이를 승락해주었다. 대신 아이다와 그녀의 아버지 아모나스로를 볼모로 잡아두게 된다.그리고 왕은 자신의 딸인 암네리스 공주를 라다메스 장군에게 짝지워 주기로 결정하고 이를 명하게 된다. 암네리스 공주는 기쁨에 겨워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반면 아이다와 라다메스 장군은 슬픔에 잠기게 된다.

 

   - 야자수가 무성해진 나일강변을 바라보는 암네리스 공주의 마음은 오늘따라 모두가 아릅답게만 보였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라다메스 장군과의 결혼 생각에 온통 설레임으로 들떠 있었다. 하지만 라다메스는 암네리스 공주와의 결혼을 명한 파라오 국왕의 지엄함을 감히 거부하지 못한 채 아이다와의 안타까운 사랑의 기도를 위해 이지스(Isis)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라다메스를 그리워 하며 남몰래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아이다는 아리아 '오! 나의 조국이여(O! Patria Mia)'를 부르면서 슬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한편 아이다의 아버지 아모나스로는 자신의 딸과 라다메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게 되었다. 아모나스로는 아이다에게 라다메스로부터 에티오피아 패잔병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는 이집트군의 진로를 알아내라고 명을 내리게 된다. 그때 라다메스가 나타나자 아모나스로는 허겁지겁 몸을 숨겼다. 아이다는 자기에게 다가서는 라다메스를 향해 암네리스 공주와 결혼할 예정이면서 왜 나를 찾아왔느냐고 툭명스럽게 말한다. 라다메스는 이번 에티오피아 패잔병 토벌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다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아이다는 라다메스에게 이집트 토벌대가 가지 않는 길로 도망치자고 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이 어디냐고 물었다. 라다메스는 '납타(Naptha)의 골짜기'라고 대답했다. 이때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던 아모나스로가 납타! 라고 외치면서 뛰쳐나왔다. 이에 놀라서 어리둥절해 하는 라다메스에게 아이다는 그들의 관계를 말해주면서 함께 도망치자고 독려하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암네리스공주 일행은 이들을 반역자라고 외치면서 무사들에게 지금 당장 체포하라고 명령하게 된다. 라다메스 곁에 있던 아모나스로는 칼을 뽑아 들고 암네리스공주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라다메스가 그를 말렸다. 그리고 라다메스는 아이다와 아모나스로가 안전하게 피신하고 난 후에 자신은 스스로 칼을 버리고 무사들의 체포에 응했다.

 

   - 궁전 안의 넓은 방은 암네리스 공주의 한탄 소리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라다메스를 잊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는 암네리스 공주는 라다메스가 어서 빨리 자신에게 돌아와 줄 것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었다. 암네리스 공주는 거짓으로 아이다가 죽었다고 지하 석굴에 갇혀있는 라다메스를 회유도 해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는 아이다가 죽은 이상 자신도 죽고 싶다는 완강한 태도였다. 이에 공주는 더욱 분개하고 만다. 공주는 그를 다시 지하 석굴로 끌고 가게 내버려 두었다. 라다메스를 지하 석굴로 보낸 암네리스 공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처형하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게 된다. 답답한 마음을 억누를 길 없어 신전으로 내려온 암네리스 공주는 라다메스를 심문하는 재판관의 목소리만 들릴뿐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는 라다메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재판관들은 라다메스에게 나라를 판 죄를 적용하여 최종 판결을 내렸다. 영원히 신전의 지하 석굴 속에 가두고 죽게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들 재판관들이 판결을 마치고 신전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다. 암네리스 공주는 그들을 향해 너무 가혹한 판결이 아니냐고 항의를 했다.

라다메스의 무덤이 될 지하 석굴의 통로 입구가 거대하고 큰 바위로 차단되고 말았다. 라다메스는 큰 바위로 차단된 음산한 석굴 속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어두운 석굴 안쪽에서 아이다가 나타났다. 그녀는 이미 큰 바위로 석굴이 차단되기 전에 몰래 들어와 라다메스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라다메스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다를 이 곳에서 내보내려고 온 힘을 다해 큰 바위를 밀쳐봤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아이다와 라다메스는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뤄 보자고 서로 부둥켜 안고 굳은 언약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애틋한 이중창 '이땅이여 안녕!(O Terra Addio!)'을 부르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련하고 애절한 우리의 주인공 아이다!... 아, 이토록 슬픈 사랑을 가슴에 안고 끝내는 라다메스의 팔에 안겨 천국을 향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이어서 라다메스도 그녀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검은 예복으로 단정히 차려 입은 암네리스 공주가 신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석굴로 이어지는 통로 입구 큰 바위 앞에 엎드린 채 아리아 '영원한 평화 있으라! 사랑하는 자여, 이지스(Isis) 신이여, 복을 내려 주옵소서!'를 부르면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암네리스 공주의 기도와 함께 신전 무녀와 제사들의 장엄한 합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단원의 막이 서서히 내린다.

 

   - 김기원의 음악세상 -